바람 속에 숨겨진 이야기
제주도는 바람이 많은 섬입니다. 그 바람은 자유롭고, 때론 거칠며, 또 한없이 부드럽습니다. 하지만 그 바람 속에는 여전히 아무도 모르게 묻힌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의 한숨과 밤마다 이어진 절규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스며 있습니다.
제주 4·3사건은 바로 그 바람 속에 살아 있는 우리의 아픈 역사입니다.
70여 년 전, 잊혀진 이름들
1947년 봄, 한 민간인이 경찰의 총에 쓰러진 순간부터 제주 땅은 피와 눈물로 얼룩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진 무자비한 진압과 학살, 그리고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제주 사람들.
“폭도”, “빨갱이”라는 낙인은 이들을 더 깊이 숨죽이게 만들었고, 유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상처를 입은 채 살아야 했습니다. 밤마다 문을 열고 돌아올 가족을 기다리며, 이름조차 부르지 못한 자식의 꿈을 꾸어야 했습니다.
"미안하다"는 그 한마디
2018년, 국가가 처음으로 공식 사과를 표했습니다. 그 한마디에 제주도민과 유족들은 수십 년간 참아온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울음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오랜 침묵 끝에 비로소 도착한 위로였습니다. 그리고 더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왜 기억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에게 제주 4·3사건은 이미 지나간 역사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일이 아닙니다.
제주 4·3평화공원에 들어서면, 검은 현무암 위에 빼곡히 새겨진 이름들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갓난아이의 이름도 있고, 노인의 이름도 있습니다.
그 이름들을 볼 때마다 “왜?”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깨닫습니다. 기억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묻는 질문이라는 것을.
새로운 세대, 그리고 희망
제주에서는 매년 4월, 추모제가 열립니다. 이제는 어린 학생들과 청년들도 이 자리에 함께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그 아픔을 글로 적고, 다시 길을 걸으며 이름을 불러봅니다.
그렇게 기억을 이어가는 일, 그것이 바로 진정한 치유의 시작입니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제주 4·3사건은 단순히 제주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 정의란 무엇인가?
-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기억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짐하게 합니다.
상처를 넘어, 공존으로
제주의 바람은 여전히 불고, 꽃은 피고, 파도는 밀려옵니다. 그 평화로운 풍경 뒤에는 여전히 아픈 역사와, 그 속에서 피어난 화해와 공존의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걸음은 제주 바람을 따라, 더 멀리, 더 깊이 나아갑니다.
상처를 넘어, 공존을 향하여.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갈 더 따뜻한 내일을 향하여.